2018/07/06 00:02

2018남미 / (8) 어느 날, 가장 완벽했던 쿠스코에서의 하루 / Peru 2018 / 남아메리카



2018. 3. 13. / D + 7

Cusco, Peru





아마도,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될 어느 날.
아침에는 비가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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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에서 주는 조식을 간단히 먹고, 우산을 쓰고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나선다.
비가 내린다기보다는 흡사 쏟아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였다.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광장으로 나간다.
쿠스코를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는 날은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비에 젖은 쿠스코 광장은 비 오는 날의 냄새와 섞여,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난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한결 식은 비 오는 날의 공기에는 특유의 향이 섞인다.
쿠스코의 그것도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쿠스코는 분지 지형이다.
광장에서는 도시를 둘러싼 언덕이 사방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언덕은 꼭대기까지 집으로, 건물로 가득 차 있다.
밤이 되면 불빛이 새어 나와 쿠스코를 둘러싼 밤하늘을 밝게 밝히곤 한다.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광장과, 광장 주변의 골목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우산 하나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가 꽤 많이 와서 바지와 신발이 많이 젖었다.

재미있는 것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는 사람은 세명 중 한명 정도 꼴일 정도로 사람들이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 날 비가 상당히 많이 왔음에도.
우산을 잘 쓰지 않는 건 페루 뿐만 아니라 남미여행을 하면서 항상 느낀 점이었다.
문화 차이가 나는 부분이겠지만 신기하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돌을 쌓아 만든 쿠스코의 독특한 건물들을 구경하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싶으면 건물 밑에 잠시 서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이 특별한 도시 한가운데 나는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일까를, 얼마나 낯설게 보일까 상상하며,

그냥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비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여행의 여 자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새로운 곳에 가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일상을 찾아보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곳에 이미 터잡고 사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소소하지만 빛나는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건 의미가 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곳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거나 하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그들이 평소에 밟는 이곳 쿠스코의 돌길, 독특한 패턴이 새겨진 이곳 골목 하나하나를 새기고 기억하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곳곳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금방 점심때가 된다.
쿠스코에 오면 꼭 가야겠다고 점찍어뒀던 곳으로 향한다.

산 페드로 시장San Pedro market.
어딜 다니든 그 지역의 시장을 가보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 된다.
특히 쿠스코의 산 페드로 시장은 굉장히 유명하다.
남미여행을 와서 한국까지 가져갈 기념품을 사야 한다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진짜 별별 없는 물건이 없는 데다가, 정말 페루스럽다, 쿠스코스럽다 싶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어 돌아다니다 보면 재미있다.
가격도 굉장히 싼데다가, 흥정하는 걸 즐긴다면 더욱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동전지갑하며 각종 마그넷, 거실 TV옆에 놓아 둘 알파카 조각상 등등... 꽤 많이 산 것 같다.

남미에 오셨으면 과일을 드세요.
온갖 종류의 열대과일을 아주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데다가 가격도 어마어마하게 싸다.
한국에서 개당 최소 5천원 이상하는 애플망고를 여기에선 4개에 5솔, 2천원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애플망고 하나만큼은 남미에 있는 동안 질리도록 먹고 가길 강력히 권한다.

들고 다니면서 먹을 거라고 하나 잘라 달라고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렸더니
쓱쓱 잘라주시면서 사진 찍으라고 웃어주셨다.

위 사진은 과일주스를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곳이다.
양에 비해서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착하다. 한잔 먹으면 배부를 정도.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남미에서 시장에 가면 저렇게 주스를 만들어 주는 곳이 있으니, 지나치지 말고 꼭 사먹어 보길 권한다.
정말정말 달고 맛있다.

사진 속의 저 주스는 아마 망고주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말 저 맛은 한번 마셔 봐야 안다.

시장 내에 으레 있을 법하게, 이렇게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 몰려 있는 곳도 있다.
정말 다양한 메뉴를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판다.

지나가다가 괜찮아 보이는 곳 아무 데나 앉아서 뜨루챠(Trucha)를 시켰다.
뜨루챠는 송어구이인데, 티티카카 호수에서 먹는 게 유명하지만 사실 페루나 볼리비아 왠만한 곳에서 주문할 수 있다.
그런데 뜨루챠만 주는 게 아니라 위에서 보다시피 국물까지 한 접시 내준다.
정말 저거 다 먹으면 배가 엄청 부르다.
거기다가 망고에 과일주스까지 섭렵하고 온 뒤였다.

가격은 5솔.
우리나라 돈으로 1700원 정도다.

참고로 남미 대부분의 국물요리에는 고수가 들어간다. 저 국물에서도 고수 향이 꽤 진하게 났다.
고수 향에 거부감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아니라면 고수를 빼고 달라는 스페인어 표현을 익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시장 주변을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다가 이걸 보고 흠칫했다.
며칠 전에 먹었던 꾸이다.
근데 고급 식당에서 먹었던 것보다도 비주얼이 훨씬 강렬하다.
게다가 위 사진은... 굽기 전 기니피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 저 이빨...

광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빵을 팔길래 하나 사서 가며 먹었다.
싸도 한 1솔쯤 되겠거니 하고 하나 달라고 했는데...
0.2솔이란다.

우리 돈 70원 정도다. 믿겨지는가?

광장으로 돌아와서 스타벅스로 갔다.
한국에서 스타벅스는 거의 안 가는데 괜히 외국이라고 또 가보고 싶어진다.
페루 스타벅스는 어떠냐고 묻는다면...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보다 가격은 좀 저렴한 것 같다.

마침 광장이 잘 보이는 창가가 비어 있길래 앉아서,
1시간 정도 일기도 쓰고 이것저것 끄적거리다가 나왔다.

비가 완전히 그친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광장 주변을 서성이는 삐끼에게 못 이기는 척 이끌려 들어갔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서 광장을 바라볼 수 있는 테라스가 몇 군데 있다.
맥주 한 잔 시켜놓고 조용히 광장을 바라볼 심산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내가 바라던 거다.

머나먼 곳.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갈 수 있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던 이곳은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좋다.
이때 이곳 테라스에 앉아 광장을 바라보며, 정말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멀고 낯선 지구 반대편으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머나먼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독특한 분위기와 순박한 사람들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최고의 날이다.

이곳 쿠스코에 다다라, 스스로 느끼기에 어떠한 식으로든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여행을 통하여 본인만의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얻기 위한 여행'이라는 건 경계하는 편이다. 여행은 여행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의미가 있으니까.

나에겐 직시하고 마주봐야 하는, 돌아설 수 없으며 시급하기까지 한 문제가 있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름의 결론도 내려야만 한다.
이날, 쿠스코에서 답을 찾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 있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기에는 아직까지 너무나도 부족한 나 자신을 넘어서고 역경도 넘어야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이 난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날의 기억은 언제였던지도 모르게 희미해지고 삶의 무게에 치여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몇 년일지 모를 시간이 흐른 후 문득, 스스로 걱정했던 것만큼 나쁜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될 순간이 있다면
그 근저에는 아마도 이 날, 쿠스코에서 혼자 보낸 하루가 있을 것이다.
이 날은 내게 있어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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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의 마지막은 광장에서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야간에 불빛이 아름답다고 정평이 난 곳인데, 제대로 찍힌 사진이 없어 정말 아쉽다.

이제 쿠스코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할 것이다.
아직 여행은 초반이고, 갈 수 있는 곳은 잔뜩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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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3일은 일기가 있었다.


3/13.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스타벅스.

남미에 온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자 페루를 떠나는 날.
페루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쿠스코를 최대한 둘러보는 것으로 잡았다.
쿠스코는 놀라운 도시다. 이 곳은 과거의 정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도시 자체가 유산인 곳이다.
이곳의 돌바닥은 단단하고, 공기는 시원하며, 골목길은 아늑할 뿐더러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다.
아마도 그 저변에는 자신들의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잉카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여행자들은 이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꿈꿔 오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던 그 어떤 감정도 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있다.

페루 일정을 좀 더 길게 잡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겉보기에는 다소 발전이 덜 되고 무례한 사람들이 가득해 보이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찬찬히 살펴본다면 그 이면에 놀라울 정도의 저력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삶에 이곳을 두 번 오게 될 일은 (아마도)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지금의 저 광장을 최대한 기억 속에 담아 두고자 한다. 나중에 언젠가 삶이 고단하고 피곤하다고 느껴질 때, 한번씩 꺼내어 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오래 유지되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거대한 행성의 대척점에, 이토록 완벽한 도시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기나긴 삶의 여정의 종착점에 정해진 결론 따위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남은 여정을 통틀어서도 꿈꿔 오던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아마 페루는 내게 있어 상상해오고 꿈꾸던 그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고 하게 되었던 곳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비록 나는 이곳을 오늘 떠나지만, 이 아름다운 도시는 계속해서 오늘과 같이 여기에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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